한편 5호: 일

🔖 제러미 리프킨이 예언한 ‘노동의 종말’은 결국 노동소득에 대한 자본소득의 우위라는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산업혁명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인 자본주의의 바탕인 프로테스탄티즘적 윤리는 노동의 종말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오늘날에는 근면한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자본을 낳는다. 자본주의가 성숙할수록 자본은 추상화되어서 돈이 돈을 낳는 것처럼 현상하는 반면, 노동은 그 어떠한 연대도 가능하지 않을 만큼 잘게 쪼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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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개인으로서의 ‘나’는 나의 노동을 통해 타자와, 더 나아가 세계와 관계 맺는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 맺음의 매개인 ‘나의 노동’은 내가 생산한 노동생산물로서의 상품, 더 나아가 화폐이며, 이 화폐가 나의 존재와 인식을 거꾸로 뒤집어 지배하고 세계 또한 거꾸로 뒤집힌 모습으로 형성하고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화폐의 물신숭배적 권력이다. 화폐는 주식이라는 투자를 통해서든 심지어 도둑질을 통해서든 더 많이 가져오면 그만인 어떤 고정된 외부의 물체가 아니다. 그 권력이 우리에게 시사하듯, 화폐는 노동으로 형성된 관계 그 자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이 아니라 주식투자를 통해, 소액주주의 자격으로 자본의 ‘파트너’가 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면 모두가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세상이 도래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화폐를 창출하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이다. ‘쥐꼬리’라는 표현이 드러내듯 노동소득이 없느니만 못한 수준으로 전락해도 노동이 화폐를 만든다는 점은, 그러니까 결국 자본이 아니라 노동이 사회의 근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정치철학에서는 권력과 권리를 외연이 동일한 범주로 간주한다. 노동소득보다 자본소득이 우위에 선다는 것인 노동자의 권리는 점점 축소되고 자본가의 권리는 점점 확대된다는 의미다. (...)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권리를 향유하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 권리의 쟁취는 항상 집단적 운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져 왔다고 갈파한 바 있다. 내가 노동자의 주식투자에 제동을 거는 것은 ‘땀 흘려 노동해 번 돈이 정직하고 선한 것’이라는 도덕주의적 비판도 아니고, 노동자가 비대칭적 정보 권력관계 속에서 주식 투자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 ‘헛꿈’ 꾸지 말라는 조언도 아니다. 너무 힘들다는 문자를 남기고 과로사한 택배노동자, 비닐하우스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이주노동자, 코로나 19로 실직한 뒤 생활고로 극단적 선택을 한 항공사 승무원. 바닥으로 떨어진 노동의 권리와 오늘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코스피 지수는 화폐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노동자가 주식을 함으로써 자본의 파트너가 되면 자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나의 소득을 주식에 넣는 만큼, 그러니까 동학개미가 힘을 모아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그 화폐의 양만큼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자본에 양도하게 되고, 노종자가 노동을 통해 정당한 임금을 받아 낼 수 있는 힘, 일터에서 자본가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할 힘은 줄어든다. 도덕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학적,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내가 주식에 넣은 돈만큼 노동자로서의 내 권리가 줄어든다. 이것은 화폐를 매개로 하나의 논리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